콜라

한번 더, 이 세계에서

웹툰 다크문: 회색 도시의 설정을 변형하여 반영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이야, 주주! 설마 너 여기 학생이야?"핑크색 머리에, 걸치고 있는 얇은 연분홍 가디건은 여학우들이나 입을 법한 디자인이었다. 보기 드물게 날카로운 이목구비까지 지나치게 눈에 튀었기에, 남자는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의주의 앞에 오자마자 유난스럽게 아는 척을 했다. 지나치리만큼 친밀하게 구는 태도였으나 의주에겐 낯선 얼굴, 낯선 체격, 낯선 목소리로, 전혀 익숙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의주를 끌어안는 순간 변의주는 어쩔 수 없이 깨달았다. 모른 척 할 수 없는 체향이었다. 고소한 동족의 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묻어나는 옅은 나무의 향. 이 냄새를 기억한다. 나자크, 그가 아니고서야 이런 냄새가 날 리 없었다. 좀 전의 밝은 목소리와는 달리 낮게 깐 목소리로, 남자가 의주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진짜 오랜만이지, 엔지?의주는 잠시 침묵한 뒤 목소리를 고르고, 모두에게 들리게끔 대답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그리고는 남자가 제 허리에 두른 손에 손을 가져가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놓았다. 별달리 의주를 구속할 의도는 아니었다는 듯, 어렵지 않게 떨어져 준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진짜 보고 싶었어! 한없이 무해한 미소였으나, 의주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종종 저를 향할 때에만 싸늘하게 굳어지던 소년의 눈빛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의주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도. 정말 오랜만이네, 우리."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주주는 내 연락도 안 받아주고."
"니콜라스 씨, 의주 선배랑 아는 사이세요?"
"엄청 엄청 친한 사이였어요. 근데 주주, 말도 없이 이사 가버려서 슬펐어."

니콜라스라. 의주는 낯선 이름을 입 안에서 몇 번 굴렸다. 그러는 사이 니콜라스는 의주의 동기들, 후배들에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의주와의 에피소드를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 있던 적이 없는 사이였으므로, 그 모든 것은 전부 거짓말이었음에도, 니콜라스는 전부 정말 진짜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한 태도였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니콜라스의 시선이 의주에게로 향했다. 눈동자가 작고 눈매가 사나웠다. 눈 앞의 얼굴과 기억 속 얼굴은 절대 동일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달랐으나, 그는 여전히 늑대였다.

"음, 니콜라스.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좋아. 우리 할 얘기가 많지."

니콜라스가 씨익 웃으며 의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 모양새는 언뜻 보기엔 다정했으나, 별 저항 없이 떨어져 주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 손에는 꽤나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망갈 생각도 없었으나 니콜라스와의 만남을 돌이켜 생각했을 때, 니콜라스의 태도는 꽤나 합당하게 느껴졌다. 의주가 니콜라스였어도 똑같이 굴었을 것 같았다. 첫 만남에서는 전 재산을 들고 튄 사기꾼이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배신자였으니까. 의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니콜라스는 쾌활하게 소리쳤다. 그럼 주주, 나 커피 사줘! 의주는 제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힘없이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알겠어, 하고 대답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요, 너는 뭐 마실래? 커피?"
"아. 나는 딸기 라떼. 휘핑크림 추가해 주세요."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딸기 라떼. 휘핑크림 추가하시고, 드시고 가시나요?"
"아, 쿠키도 하나 주세요. 아몬드 초코칩으로요."
"네. 쿠키까지 14,500원입니다. 카드 앞쪽에 꽂아주세요."

커피 사달라고 할 땐 언제고. 니콜라스는 딸기 라떼에 쿠키까지 골라 주문했다. 그게 그냥 관용적 표현이었음을 알았지만 의외라고 생각하며 카드를 꽂았다. 니콜라스는 오오 주주, 멋있는데,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불평할 처지가 아닌 걸 알아 입 밖으론 내뱉지 못했는데, 연신 싱글싱글 웃어대는 니콜라스의 태도 때문에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시간대가 애매하여 카페 안은 한산했다. 진동벨을 받아들고, 의주는 그 중에서도 그나마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구석 자리로 향했다. 사람들이 피한 곳엔 이유가 다 있었다. 의자가 딱딱하고 불편하고 테이블이 작은 자리였다. 의주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싱글거리며 의주를 바라보았다.

"우리 할 얘기가 많지, 그치?"
"네가 많겠지. 들어줄게."
"서운하게 구네. 그래도 우리, 가족인데."
"...내가 무슨 네 가족이야."
"그럼 동족? 어느 쪽이든 난 상관없지만, 너한텐 별로 달갑진 않은 단어잖아. 특히 여기서는."

맞는 말이었다. 의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의주는 그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뭘 바라고 찾아왔을까. 가늠이 잘 안 됐다. 진동벨이 울렸고, 니콜라스는 진동벨을 집어들며 기다리고 있어, 하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 참 그다웠고, 그건 의주를 계속 부끄럽게 했다.니콜라스가 쟁반을 들고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으나, 의주는 그새 심호흡을 좀 한 상태였다. 고마워,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고 니콜라스가 픽 웃으며 쿠키를 조금 떼어 의주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입을 조금 벌려 얌전히 받아먹자 니콜라스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많이 착해졌네, 너. 예전엔 엄청 떽떽거렸는데. 내가 무슨 떽떽거려. 증인 데려와? 전화만 하면 금방 올걸. 누가 증인인데. 누구겠어. 그래. 기리 형. 그 사람이겠지. 니콜라스가 잠시 침묵했다.

"형은 죽었어. 타헬이 와야겠네."
"...죽었다고?"
"그건 네 잘못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그냥... 그렇게 됐어."
"...유감이야. 안타깝네."
"네 잘못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그건 형 선택이기도 했어."

의주는 다시 침묵했다. 니콜라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으나, 그에게도 익숙한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계속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던 그 눈이 낮게 가라앉는 걸 봐 버린 뒤였으니, 더 입을 열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의주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의주를 보며, 니콜라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얼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야. 아니야?

"응. 나는 그냥..."
"그럼 왜 왔어? 내가 널 보고 어떤 얼굴을 할 줄 알고."
"주주, 아니 엔지. 나는."
"여기까지 와 놓고 우연이란 얘긴 아니겠지. 난 네가 불편해. 네가 나자크든 니콜라스든."
"으아, 방금 그 말 상처다, 주주."
"그리고 난 주주도 아니고 엔지도 아니야. 변의주지."

아, 그래, 니콜라스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의주의 기분은 최악으로 쳐박혔다. 제 쪽에서 화낼 처지가 아닌데. 지금만 해도 말실수를 한 건 제 쪽이고, 그 옛날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잘못했다고, 미안했다고 말해도 부족하다는 걸 아는데도 적반하장으로 구는 꼴이라니.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통제하기가 지나치게 어려웠다. 의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 엔지로 태어나서 변의주가 되기까지, 살아온 세월이 그리 짧지 않았다. 스무 살 언저리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좋은 평판을 구축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화내지 않고 항상 차분하고, 이해심 있게 구는 태도. 당연하다. 한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그리 쉽게 감정이 동요될 리가 있겠냐고. 화내는 쪽이 이상하다. 그러나 니콜라스를 앞에 두니 덜 자라 철없이 굴던 그 시절처럼 굴게 된다.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볼게. 다음 수업이 있거든."
"의주, 나는 그냥."
"미안, 더는 얘기 못 하겠다."

의주는 끝끝내 니콜라스를 외면했다. 가방을 집어들고 도망치듯 발을 놀렸다. 니콜라스는 따라오지 않았다. 뜻밖이었다. 당황해하던 얼굴이 눈에 밟혔다. 니콜라스, 그리고 그 일행들과의 모든 일들은 이상하리만큼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있었다. 언젠간 찾아오리라고도 가끔 생각했다. 당장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따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니콜라스의 태도는 이상하게 유했고 이상하게 다정했다. 의주가 정말 참을 수 없어지던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차라리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들었으면 뜻대로 따라주었을 것을. 몇 대쯤은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니콜라스가 저에게 폭력을 쓰지 않으리라는 걸 의주는 알았다. 장난스럽고 다정하던 눈은 꼭 그를 경계하다가도 한 번씩 형제 취급하던 그 때에서 변함이 없었다. 어째서일까. 의주는 계속 니콜라스를 생각했고, 그가 그런 방식으로 제 앞에 나타난 이상 어쩔 수 없이 계속 마주치게 되리란 걸 알았으나, 그를 다시 볼 일이 자주 있지는 않기를 바랬다. 물론, 턱도 없는 바람이었다.

니콜라스가 의주의 집 앞에 찾아온 건 바로 그 날 저녁이었다. 안녕, 의주. 니콜라스는 양 손에 몸통만한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의주는 말을 잃고 입술만을 뻐끔거렸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가끔 여러 이유로 의주의 집을 찾는 동기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어준 게 패착이었다. 니콜라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의주의 집 안으로 들어왔고 어렵지 않게 캐리어 두 짝도 의주의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의주 집 되게 좋다. 넓네. 의주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들어와 집 안을 들여다보는 니콜라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의 발길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제 손목을 잡은 손을 니콜라스가 빤히 들여다보는 것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어떻게 알았냐니. 너도 알잖아. 내가 여기 있는게 우연일 리 없다는 거."
"원하는 게 뭔데? 돈이라도 필요해?"
"돈.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좀 부족하지 않나?"
"돈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나가."
"부족하다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니콜라스가 씨익 웃었고. 의주에게 잡힌 손목을 굳이 빼내지 않은 채로 의주의 집을 계속 둘러보았다. 니콜라스는 의주보다 힘이 강했고 의주는 어쩔 수 없이 니콜라스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손을 놓는 게 낫겠다 싶을 때쯤 니콜라스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의주는 반동에 의해 몸을 조금 휘청이고야 말았다. 니콜라스가 작게 키득거렸다. 의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뭘 바라는 거야. 니콜라스가 손가락으로 매트리스를 가리켰다. 의주의 집은 다른 동기와 살기 위해 구했던 투룸이었는데, 그가 휴학을 하게 되어 방이 하나가 비어 있었다. 다른 동기들이 종종 의주의 집을 찾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방이 하나가 남고, 침대 하나가 남았다. 니콜라스는 그걸 짚어내고 있었고, 의주는 불길함에 니콜라스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니콜라스가 빨랐다. 나 좀 재워주라.

"뭐?"
"재워달라고. 아, Sex 말고 Sleep.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
"무슨... 그렇게 생각 안 했어! 그리고 Sleep이면 괜찮을 줄 알아?"
"안 괜찮을 이유가 있어?"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설마. 우리가 그렇게 다정한 사이는 아니지."

장난같은 걸 칠 정도로 즐거운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 니콜라스는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도저히 나갈 의지가 보이지 않아 의주는 숨을 골랐다. 대체 뭘 원하고 이런 요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이 둘이 살기 딱 좋네. 나 지금 갈 곳도 없는데 딱이다. 의주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른 집 구해주는 건 어때. 니콜라스가 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주 돈이 그렇게 많아? 부자네?

"아, 이제라도 우리 돈 돌려주는 거야?"
"그 돈이면 서울에서 원룸 보증금도 안 돼. 그래도 그냥 이자까지라고 생각하고 해줄 테니까 제발, 좀."
"그래도 싫어."
"대체 왜?"
"혼자는 외롭잖아. 가족끼리 같이 살아야지."
"가족은 무슨 가족,"
"그리고 나 갈 곳도 없어. 내가 여기 아는 사람이 너 말고 더 있겠어?"

순전히 제멋대로였다. 니콜라스는 황망해하는 의주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캐리어를 방 안으로 들여와 짐을 마구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캐리어의 2/3 이상이 전부 옷이였다. 의주는 니콜라스가 옷을 정리하는 걸 멍하게 보고만 있었다. 말릴 기운도 나지 않았다. 의주는 반쯤 포기한 채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건데? 으음... 글쎄. 니콜라스는 그것에도 속시원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의주는 조금 초조해져서, 니콜라스의 어깨를 잡았다. 야. 나자크. 니콜라스가 뒤를 돌았다. 아. 또다시, 늑대의 눈이다. 의주가 흠칫했다.

"의주."
"...어."
"네가 엔지가 아니면 나도 나자크가 아냐."

그게 여기서 왜 중요한데. 의주는 말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니콜라스의 눈이 진지했다. 말꼬리를 잡는 말 따위는 하지 말아야만 할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니콜라스가 다시 생긋 웃었다. 사나웠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농담. 편한 대로 해. ...됐어. 의주는 말 끝을 흐렸다. 계속 휘둘리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있을 건데, 너. 모르겠는데? 나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거야. 나랑 계속 있겠다고? 응. 왜? 글쎄. 술술 잘만 말하던 니콜라스가 잠시 침묵했다.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대답했다.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네."
"장난칠 정도로 다정한 사이 아니라면서."
"장난은 아닌데, 나도 네가 왜 자꾸 신경 쓰이는진 모르겠어."
"...내가, 신경 쓰인다고?"
"그래. 엄청. 그래서 계속 찾았어."

동족이라 그런가? 니콜라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의주는 어째서인지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려옴을 느꼈다. 자신은 배신자였다. 사기꾼이었고. 비난하고 원망해도 모자란 와중에 니콜라스는 지나치리만큼 무르게 굴었다. 이 애의 형제들도 똑같이 물러터졌었다. 동족을 상대로 사기나 치고 있는 놈을 붙잡고도 형제가 되자고 권유했던, 늘 삐딱하게 굴던 엔지를 타이르려 했던 남자. 졸졸 쫓아다니며 형 타령을 하던 어린 애. 둘 다 지나치게 순진하고 무른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저를 경계하던 게 나자크, 그러니까 니콜라스 이 애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이 애도 그 형제들 중 하나여서, 뻔뻔하게 굴면서도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자꾸 상황에 맞지 않게 다정한 말을 했다. 저를 괴롭히려고 찾아온 것이어야 정상일 텐데 자꾸 다른 의도가 있는 것마냥 굴었다.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의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니콜라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일단은 알겠어. 마음대로 해 봐."
"오. 진짜?"
"대신 난 그냥 변의주고. 넌 니콜라스야. 교환학생인 널 도와주는 거고 그 이상은 없어. 알아들어?"
"알겠어. 그런 컨셉."
"컨셉이 아니라... 됐어. 마음대로 생각해."

의주는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니콜라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가 재밌다고 웃을까. 의주 되게 귀여워졌다. 저건 또 무슨 소리고. 의주는 당분간 꽤 피곤하겠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무섭고 정이 무섭다더니. 처음엔 그렇게 껄끄러웠는데, 데면데면하게라도 그렇게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날이 하루씩 쌓이고 얼굴 대하는 일이 생기다보니 어느 순간 의주는 니콜라스가 익숙해졌다. 오고 가며 주주(의주가 주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때 니콜라스가 그 말을 들어 의주라고 불러준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스는 의주를 다시 주주, 라며 제 마음대로의 애칭으로 불러댔다.) 나 왔어, 주주 오늘 늦었네, 주주 잘 다녀와, 하고 말을 붙이는 것을 무시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조금씩 대꾸하다보니 니콜라스와의 대화도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지나치게 눈에 튀는 화려한 패션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니콜라스가 한 번 집 근처에서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이었다며 사온 햄버거를 나누어 먹은 이후엔 식사를 같이 하는 일도 종종 생겼다.말 그대로, 니콜라스와의 생활은 의주의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평범했다. 물론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샤워를 지나치게 오래 한다던가, 늦은 시간에 요란하게 들어온다던가 따위의 사소한 문제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정말 사소한 문제들이지. 다른 룸메이트를 구해도 있을 법한 문제니까. 의주는 그들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와의 동거가 매우 불편할 거라 생각했지만, 니콜라스와의 동거는 의주가 생각했던 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고,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딱히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의주는 문득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뭘까.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때마침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니콜라스가 집에 돌아왔다. 간만의 대면이었다. 의주는 최대한 태연하려 노력하며 니콜라스에게 말을 붙였다.

"왔어? 늦었네."
"아. 얘기가 좀 길어져서. 설마 주주, 나 기다렸어?"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기다렸구나. 헐. 감동이야."

니콜라스가 애교있는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의주는 그에게 말을 붙인 걸 잠시 후회했다. 내가 미쳤다고... 가만 보니 니콜라스의 뺨이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술이라도 마시다 온 모양인지 평소보다 목소리도 높았다. 그냥 들어가서 자게 내버려 둘걸.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의주는 급기야 니콜라스가 온 몸으로 부딪혀오는 걸 감당해야만 했다. 술냄새는 별로 안 나는데. 얘 설마 일부러 이러나. 그 순간 니콜라스가 의주가 귀엽다는 듯 흐흐, 웃었다. 일부러는 아니구나, 생각했다.

"근데 너 누구랑 그렇게 술을 마셔. 아는 사람도 없다면서."
"몰라. 한국에서는 원래 이런다던데. 마시면서 친해진다고."
"너 지금 발음도 엉망인 거 알아? 다음부턴 조심해."
"네에 마마."
"무슨 헛소리를."
"미안. 근데 엄마 보고 싶어서."

니콜라스가 의주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그야 니콜라스나, 저나 비슷한 사정이니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의주가 어색하게 니콜라스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일인가. 대체 얼마나 취했길래. 그런데 이상하게 니콜라스의 체온이 높게 느껴졌다. 원래 늑대인간들은 체온이 높은 편이긴 한데 그런 것치고도. 문득, 오늘 날짜가 며칠이었나, 그 생각이 들었다. 의주가 황급히 창문 밖을 보았다. 보름이었다.

"야, 너."
"주주, 나 지금 주주가 두 명으로 보여. 왜 그러지?"
"진짜 미쳤구나."

의주가 황급히 니콜라스의 몸을 돌렸다. 눈빛이 흐릿하고 얼굴은 이제 창백해진 채였는데, 그와 대조되도록 몸은 울긋불긋했다. 니콜라스는 완전히 헤롱거리고 있었다. 의주도 몇 번 이런 적이 있다. 보름달이 뜨는 날 늑대인간들은 가장 강해지면서도 또 가장 취약해졌다. 가장 본능에 가까워지는 탓이었다.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근육이 단단해지면서 맞서 싸우기에 최적화된 상태가 되는데, 또 내부적 자극에는 한없이 취약해졌다. 같은 술을 마셔도 몇 배로 취기가 올라왔다. 의주도 몇 번 실수할 뻔한 적이 있다.몇 번 난처해질 뻔한 이후로 보름달이 뜨는 날엔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설마 니콜라스가 그걸 모를 줄은 몰랐다. 아니면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보름달이 뜨는 주기를 계산하지 못한 건가. 서울은 대기가 그리 좋지 않아 달의 힘이 약한 편이긴 했다. 의주도 서울에 처음 왔을 땐 직접 달을 보지 않는 이상 보름인지 아닌지 헷갈려하곤 했다. 어느 쪽이든, 니콜라스는 지금 꼭 마약이라도 과하게 흡입한 듯 헤롱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둘 순 없을 듯해 니콜라스의 등과 다리 사이에 팔을 넣어 그를 안아올렸다. 니콜라스가 으응? 하며 의주를 쳐다봤다. 여전히 눈엔 초점이 없었다.

"뭐야, 주주.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설마 버리려고? 그러면 안 돼. 그건 나빠."
"버리긴 뭘 버려. 네 방으로 가야지. 정신 좀 차려."
"아, 내 방. 내 방이 있지, 여기에."

여전히 헛소리였다. 와중에 니콜라스가 의주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니콜라스의 침대에 니콜라스를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니콜라스가 쉽게 떨어져주려 하지 않아 의주는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힘은 또 왜 이렇게 센 거야. 간신히 니콜라스를 떼어 놓고서, 의주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니콜라스가 혼자 허우적대게 둘지, 뭐라도 간호를 해줘야 할지. 간호라고 해 봐야 의주가 아는 늑대인간이라곤 의주 자신뿐이었으니 늑대인간을 간호하는 방법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저 몸의 열이라도 떨어트려주는게 니콜라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건 알았다. 그냥 둬도 큰 문제까지는 생기지 않을 테지만, 니콜라스가 불편한지 낑낑대는 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렸다. 아마 내버려두면 밤새 저러겠지...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의주가 소매를 걷었다. 미지근한 물로 수건을 가볍게 적셔 준비하고 적당히 편할 법한 옷을 골라 니콜라스에게로 다가가자, 니콜라스가 벌떡 일어나 앉은 채 경계심 어린 눈으로 의주를 쳐다봤다. 뭐야, 엔지. 의주가 미간을 조금 구겼다.

"나자크."
"어, 엔지."
"난 니가 정말 싫어.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니콜라스가 조용해졌다. 의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니콜라스에게서 물러나는 대신 니콜라스의 몸에 손을 올렸다. 아, 정말 싫다. 그러나 거부감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옷은 항상 그랬듯 요란한 모양새였다. 팔 들어 봐. 니콜라스가 순순히 팔을 올렸다. 의주가 빠르게 니콜라스의 옷을 벗겨냈다. 니콜라스가 멍한 눈으로 의주를 바라봤다. 나쁜 짓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그냥 옷을 갈아입혀줄 뿐인데도. 그렇게 보지 마. 의주가 니콜라스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니콜라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엔지, 너 설마 나를."
"그렇게 보지 말랬지. 그리고 이상한 말도 하지 마."

니콜라스의 몸은 여전히 열이 펄펄 끓어 뜨거웠다. 이 몸으로 농담은 참 열심히도 한다 싶었다. 가져온 수건으로 니콜라스의 몸을 꾹꾹 눌러 닦자 니콜라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그냥 그만둘까, 생각하면서도 의주의 손은 착실히 움직였다. 열이 어느 정도 식은 뒤에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편한 옷을 입혔다. 니콜라스가 그제서야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주, 넌 진짜 이상해. 이젠 또 의주였다. 항상 그랬듯 순전히 제 마음대로였다. 다리도 해 줄 거야?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당연하지. 보면 몰라?"
"...그 쪽은 니가 알아서 해."

의주가 빨개진 얼굴로 니콜라스에게 편한 바지를 대충 안겼다. 지금 보니 니콜라스의 시선이 어느 정도 또렷하게 돌아와 있었다. 니콜라스는 계속 재밌다는 듯 킥킥거렸다. 주주 귀여워. 듣기 싫은 소리도 함께였다. 이제 완전히 제정신이군. 의주가 질색하며 니콜라스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니, 알아서 하겠구나 싶어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등 뒤에서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엔지. 의주가 단번에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싫은 녀석이었다.니콜라스는 그 날 이후로 의주에게 좀 더 친밀하게 굴었다. 니콜라스와의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제게 딱히 바라는 게 없는 듯이 구는 점이었는데, 그렇지도 않게 되어버린 시점에서 의주는 니콜라스가 한층 더 골치아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싫은 점은, 니콜라스가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의주도 니콜라스가 망쳐놓은 일상에 익숙해져버렸단 것이었다. 얼른 쟤를 내보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데도 단호히 굴 수가 없었다. 이게 진짜 뭐하는 거지.

의주의 집은 그 근방에서 구할 수 있는 방 중엔 그럭저럭 괜찮은 집 중 하나였지만, 방음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편이었다. 니콜라스의 방과 의주의 방은 벽 하나로 분리되어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니콜라스가 방에서 뭘 하든 의주는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니콜라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늑대인간들은 대부분 감각이 예민한 편이었기에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정도였다. 의주는 지금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니콜라스가 낮게 허밍하는 소리. 딱히 가사도 없고,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흥얼거릴 뿐인 멜로디. 별로 반갑지 않은, 익숙한 멜로디였다.

"야. 니콜라스."
"뭐야. 왜 거기서 불러."
"어차피 다 들리잖아."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니콜라스가 입술을 비죽이고 있을 걸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말을 하느라 허밍을 멈춘 상태였는데, 의주는 그제서야 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노래 그만 불러. 여기까지 들려. 어? 들렸어? 이 정도면 안 들릴 거라 생각했는데. 쏘리. 니콜라스는 생각보다 담담한 어조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노랫소리가 멈춘 걸 듣고 의주가 낮게 숨을 내쉬자, 니콜라스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기억하고 있네. 의외다.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듯 들렸다.

"이거, 기리 형이 맨날 부르던 노래잖아."
"그래. 기억해."
"그러냐. 다 잊고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널 여기 들이지도 않았겠지."

흐음,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뚜벅뚜벅 걸어와 의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갑자기. 의주가 인상을 찡그리고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니콜라스가 씩 웃으며 제안했다. 주주, 한강 가자. 뭐? 갑자기? 응. 자전거 타고 싶어.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안 가주면 계속 여기서 귀찮게 군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보는 눈가에 힘을 주었지만, 니콜라스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아하하, 웃으면서 의주 귀여워, 따위의 소리를 할 뿐이었다.결국 백기를 든 쪽은 의주였다. 이제서야 저녁을 먹은 참이었다. 아주 못 본 척 잠이나 잘 수도 없고, 공부를 하자니 니콜라스가 거슬리고. 얇은 가디건을 걸치며 가자, 하니 니콜라스가 해맑게도 와, 진짜 같이 가주는 거야? 소리를 했다. 진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버틸 수도 있을 녀석이 얄밉게 구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주주, 안 그런 척 하면서 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헛소리를... 안 갈 거면 들어가고. 아 아냐. 니콜라스가 급하게 나갈 준비를 마쳤다.

"주주 나랑 내기할래?"
"무슨 내기."
"저기까지 먼저 가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그렇게 한강에 도착해서 자전거 두 대를 빌리고, 나란한 속도로 한가로이 자전거 페달을 밟던 중 니콜라스는 내기를 제안했다. 니콜라스가 저기, 라며 가리킨 건 꽤 먼 곳에 있는 다리였다. 나한테 또 바라는 게 있어? 묻자 니콜라스가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하며 킥킥거렸다. 의주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니콜라스는 그럼 셋 세면 시작이야, 하더니 숨을 쉬지도 않고 하나둘셋, 을 빠르게 외친 뒤 속도를 높였다. 잠깐 흠칫하는 동안 멀리도 나간 니콜라스를 따라잡으려 의주도 속도를 높였다.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 얼굴을 때렸다. 방심한 건 아주 찰나였는데, 그 사이 벌어진 간격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뒤쳐진 위치에서 페달을 밟으며 의주는 슬쩍 니콜라스를 쳐다봤다. 니콜라스의 얼굴은 가만히 있으면 꽤 사나운 편이었는데 지금처럼 즐거워하고 있을 땐 꼭 아이 같았다. 아. 즐거워하고 있구나. 사정없이 흩날리는 머리와 바람에 쓸려 빨개진 광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가슴에 쿡 박혔다. 어쩌면, 얘랑, 진작에...의주의 생각은 그 쯤에서 멈췄다. 목표한 지점에 도착한 니콜라스가 두 팔을 벌리며 힘껏 소리지른 탓이었다. 으아, 이겼다! 반칙해서 이긴 게 그렇게 좋아? 반칙은 무슨 반칙. 주주, 승부를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는 좋지 않아. 으스대는 꼴에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 걸로 치자. 그런 걸로 치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 니콜라스가 씩 웃으며 의주의 볼을 찔렀다. 아직 어리네, 주주. 누가 할 소리를. 의주는 황당하기만 했다.자전거를 반납한 직후에 니콜라스는 편의점에 들리자고 제안했다. 목 마르지 않아? 맥주 마시자.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으나, 그 때는 보름이어서 그랬겠지. 의주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승낙했다. 안주도 필요해? 굳이? 의주는 고개를 저었으나 니콜라스는 나는 필요해, 하며 젤리를 집어들었다. 저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 니콜라스는 뻔뻔하게도 계산대 앞에서 멀뚱멀뚱 의주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의주는 조금 황당해하면서도 얌전히 카드를 내밀었다. 니콜라스가 실실 웃어댔다.

"주주는 진짜 착한 것 같아. 누구랑은 다르네. 누구는 남의 돈 다 들고 한밤중에 도망갔는데 주주는 내가 고른 거 계산도 해 주고."
"시끄러워. 반품해줘?"
"아니아니."

니콜라스가 잽싸게 봉지를 끌어안았다. 의주는 순간 진짜 뺏어나 볼까, 잠깐 생각하고는 관두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캔을 땄다. 가볍게 건배하고 한 모금 들이켰는데 니콜라스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맛없어... 쓰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의주가 황당해서 캐물었다. 너 술 못해? 맥주 마시고 싶은 거 아니었어? 니콜라스가 으, 하고 고개를 부르르 떨며 답했다. 분위기라는 거지. 무드. 의주는 참 재미없다. 허. 근데 그게 또 주주 매력이긴 해. 아, 그래. 의주가 홀로 캔을 한 번 더 들었다.

"그동안은 어떻게 살았어?"
"뭐?"
"항상 궁금했거든. 넌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우리는 진짜 잘 지냈거든. 다른 형제들도 만나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구경도 하고... 니콜라스의 눈빛은 어딘가 아련한 빛을 띄고 있었다. 의주는 그 순간 궁금해졌다. 그렇게 잘 살았다면서 왜 여기까지 왔지. 나 하나 쯤은 그냥 모르는 척 하면 될 걸 왜 그 좋다는 것들을 다 두고 여기까지 왔지. 그래서 말했다. 그럼 그대로 잘 살지 왜 여기까지 왔어. 니콜라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그래도 니가 눈에 밟히더라고.

"잘 살고 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밤에 잠은 잘 자는지."
"그거 오지랖인 건 알아?"
"너도 그래서 그랬던 거 아냐?"
"내가 뭘?"
"그 날 말야. 내가 싫다고 해도 안 멈췄던 거."

의주는 말 없이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둘 중 누구도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지 않았고, 형형한 눈빛만이 오고 갔다. 의주는 문득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그래서 말했다. 네가 싫었어. 항상. 니콜라스는 침묵했다. 그래도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네 의지랑은 상관없이. 니콜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그건 네가 네 형제들을 배신하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거. 의주는 먼 곳을 본다. 아주 먼 곳을. 그래도 네가 죽는 건 보기 싫었어. 잊고 살았던, 그래야만 했던 먼 옛날을 회상했다.

뱀파이어들의 습격에 가족들을 전부 잃고 누나와 둘만 살아남았다. 다 자라지도 못해 대충 보기에도 어린 남매 둘이 인간들의 도시에서 자리잡기까지, 험난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사실 자리잡았다고 할 수도 없는 셈이다. 누나는 간신히 마련한 보금자리에 몸을 몇 번 뉘여보지도 못하고 인간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구도 대가 없이 남을 도와주진 않는다. 인간들은 각박했으며 도시는 차가웠다. 다들 제 이득을 취하려 눈이 벌개져 있는 곳이었다.누나는 홀로 남을 엔지의 손을 감싸며 마지막 순간에도 엔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렴, 친구를 만나고 가족을 만들어. 라고 말했지만, 엔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나는 착해서 죽었다. 착해서, 사람을 믿었기에 죽었다. 항상 따뜻하던 손이 싸늘하게 식어가던 순간을 기억했다. 온 몸의 수분이 빠져나갈 듯 눈물이 자꾸 나오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런 순간을 겪고 싶지 않았다. 엔지는 홀로 보내는 밤을 몇 번을 견디다가, 생각했다. 나라고 못할 게 뭐야?누나를 등쳐먹은 사장의 집을 터는 것으로 시작했다. 어리다고 한들 늑대는 늑대였다. 작정하고 덤비니 고작 인간 몇 명쯤 못 이길 이유가 없었다. 은행이랄 것도 없던 시대였다. 엉성한 금고를 깨부수고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도망치는 동안 몸은 엉망이 됐지만,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다. 그랬으면, 누나를 잃지도 않았을 텐데. 잠시 우울해졌다가 의식적으로 생각을 그만두었다.시작이 어려웠지, 그 뒤는 쉬웠다. 원래 머리가 좋았다. 훔친 돈으로 그럴싸하게 차려입고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접근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뒷배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되는 양 행세했다. 제가 듣기에도 말도 안 된다 싶은 말이었는데 그걸 믿더라. 겉보기에 그럴싸할 뿐, 가진 건 아무 것도 없는 게 엔지의 실상이었다. 그런데도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멍청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했다. 기리와 나자크, 타헬 세 형제를 만난 건 그런 시점이었다. 엔지가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던 때.셋을 만나자마자 알았다. 동족이구나. 누나를 그렇게 떠나보낸 이후로 동족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셋에게선 늑대 냄새가 풀풀 났다. 고소한 냄새. 막 인간 사회로 나온 듯 어수룩했다. 저렇게 멍청해서야 인간들에게 당하기 딱 좋지. 집을 구하기에는 턱도 없이 작은 금액을 들고 살 곳을 찾는다고 했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나도 속이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몰랐다. 그 돈으로 그런 집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한데, 좋다고 헤실거리는 꼴들하고는. 전화기 선을 끊어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만났더라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나, 그 당시의 엔지는 이미 양심이라 할 만한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잡힌 거다. 말도 안 되는 실책이었다. 기리의 손에 멱살을 잡혀 달랑달랑 들린 채로, 엔지는 눈을 꽉 감았다. 뺨이 얼얼해질 걸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너, 보호자는?"
"...뭐?"
"딱 보니 어린 애 같은데. 보호자는? 무리는 없어? 혼자야?"

기리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제정신인가? 엔지는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우리 무리에 들어와, 따위의 말을 했다. 타헬인지 뭔지 하는 어린 애는 그래, 혼자는 위험해,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저를 탐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보는 건 오직 나자크, 하나뿐이었다. 웃기는 소리였다. 멍청해. 정말 멍청해. 그러나 어른 루가루가 포함된 세 명의 무리를 어린 엔지가 혼자 떨쳐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리는 자기 무리에 들어오라는 속 없는 소리를 하면서도, 엔지가 사기꾼이라는 건 잊지 않았다. 결국 집에 세 늑대인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시끄러운 날들이었다. 알면 알수록 그들이 싫어졌다. 속도 없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저를 붙잡고도 당장 탈탈 털어 돈을 돌려받지 않는 것도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가진 걸 다 털린 거였을 게 뻔했는데 어쨌거나 우린 집이 필요했고 너는 집을 제공했고, 결과적으로는 된 거네, 따위의 소리를 했다. 사기꾼인 저에게 어린 애가 그렇게 부실하게 먹으면 안 돼, 같은 실 없는 소리나 했다. 억지로 자리에 앉혀 같이 숟가락을 들게 했다. 그렇게 권한 식사는 항상 맛이 더럽게 없었다. 기리는 성가셨고 타헬은 귀찮았다.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그러나 그들 중 가장 싫은 건 나자크였다.나자크가 싫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 열등감이었다. 대충 듣기로 저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사정이었는데, 사기꾼이 된 저와는 달리 여전히 올곧은 그 애가 싫었다. 금방 경계심을 풀고 형, 형 하며 따라다니는 타헬과 속도 없는지 마구잡이로 동생 취급을 하는 기리 사이에서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 애가 싫었다. 너라고 뭐 다를 줄 알아? 너도 나였으면, 그런 말은 항상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사라졌다. 그 애에게, 제가 그를 부러워한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기리와 타헬은 둘이 사이가 좋아지기를 바랬지만, 둘 다 서로를 싫어한다는 걸 굳이 감추지 않았다.분명 그랬는데. 분명 서로 날을 세우고 경계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나자크는 엔지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 앞을 가로막았다. 분명 다 인간이었는데, 돈을 내놓으라며 눈이 시뻘개진 꼴들이 꼭 뱀파이어 같았다. 순간 트라우마가 몰려들어 움츠러든 엔지를 나자크가 감싸고 돌았다. 얘한테 볼 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얘 형이니까. 그 단단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내 일이야. 너는 그냥 가, 하는 말에 나자크는 야, 그래도 너는 내 동생이야. 그런 소리나 했다. 기리 형이 인정했으니까 너는 내 동생이야. 그 누구를 닮아 속도 없는 소리. 엔지가 눈을 질끈 감았다.간신히 집으로 돌아갔을 땐 둘 다 꼴이 엉망이었다. 이유가 뻔히 보였을 텐데 기리도 타헬도 엔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자크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간 재료가 거의 없어 밋밋하기만 한 수프를 나누며 맛있다고들 떠들었다. 다 멍청이들이야. 엔지는 셋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곁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들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내가 집을 버리면 된다. 혼자가 되는 거다. 원래 그렇게 살았으니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눈을 떠 숨겨뒀던 돈을 챙겼다.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운동이라도 가냐?""신경 꺼."나자크였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 게 뻔한 모양이었을 텐데, 그런 소리나 했다. 엔지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대꾸했다. 잠이나 자. 나자크는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낸다면 기리도 타헬도 금방 일어나 엔지를 제압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늑대의 눈동자는 지나치리만큼 잘 보였기에 엔지는 나자크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잘 살아라. 얼핏 듣기에 심드렁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엔지가 입 안을 꽉 깨물었다.그들에게서 도망치는 길은 유난하게도 추웠다. 도망치는 게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그 손에 처음 붙잡혔을 때 도망칠걸, 그들을 집으로 들이지 말걸, 그런 생각을 했다. 집을 막 나설 때 언뜻 소란한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그를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엔지는 그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코 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겨울이었다.그러나 엔지는 오래 가지도 못해 제가 배신했던 인간들에 의해 뱀파이어들의 손으로 넘겨졌다. 끝까지 저항하려 애썼으나, 어린 늑대인간의 몸으로 저항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자 뱀파이어는 처음엔 지루한 눈으로 엔지가 저항하는 꼴을 구경하다가, 엔지가 끝까지 뱀파이어의 발목을 물고 늘어지자 흥미롭다는 듯 엔지에게로 다가왔다. 불길했다.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엔지는 저항하는 것도 멈추고 눈을 꽉 감았다. 감이 좋은 아이네. 언뜻 듣기에 달콤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안 돼. 눈 뜨면 안 돼. 엔지는 몸을 떨었다. 지금 눈을 뜨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저항은 거기까지였다. 얼른 눈 뜨렴."나는 말을 안 듣는 아이는 좋아하지 않는단다."몸의 주도권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엔지의 의지와는 별개로 눈이 뜨였다. 새빨간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안 돼. 이래서는... 그러나 별 수 없이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게 마지막 저항이었다.엔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전투의 한복판이었다. 피 냄새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는데, 엔지를 더 정신차리기 힘들게 한 것은 그가 제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움직이던 기억들이었다. 그게 다 기억이 났다. 엔지는 제 기억들을 부정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잖아. 그러나 제 의지가 아니었을지라도, 엔지의 몸 곳곳엔 기억에 없는 상처들이 남아있었다. 눈물이 났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그런 식으로 살아있을 바에야 죽었어야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걷던 와중 눈에 들어온 건 나자크였다. 뱀파이어들에게 둘러싸여,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휘청거리는 나자크. 늑대로 변할 힘도 없는지 인간인 모습이었다.잘 살아라, 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엔지는 늑대로 변해 곧장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나자크의 뒷덜미를 물고 아무 곳으로 달렸다. 나자크가 버둥거렸다. 뭐 하는 거야, 놔! 놓으라고! 처절한 목소리였다. 엔지라고 온전한 몸상태는 아니었다. 나자크와 비슷하게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목에서 피 맛이 났다. 온 몸이 얼얼하고 다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야! 싫다고! 죽여버린다! 너 진짜 죽여버릴 거라고! 나자크는 계속 저항했다. 엔지는 어느 정도 안전할 만한 곳에 그를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안전하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도시를 에워싼 뱀파이어들이 목표가 따로 있는 듯 굴어 저희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엔지는 달렸다. 다리가 끊어질 듯 아려도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였다. 뱀파이어들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엔지의 다리가 꼬였다. 볼품없이 엉망진창인 두 몸이 나뒹굴었다. 엔지는 그제서야 하, 하고 숨을 내쉬었는데, 나자크는 벌떡 일어섰다. 망설임이라곤 없는 움직임이었다.

"간다. 넌 따라오든 말든 알아서 해."
"너, 가면 죽어. 백 퍼센트 죽을 거야."
"너한테 구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 죽어도 거기서 죽을 거야. 신경 꺼."
"...야!"

엔지는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나자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봤자 나자크 하나의 합류로 전세가 달라질 리가 없다. 더군다나 저렇게 엉망인 몸 상태로는 더 그랬다. 가봤자 죽을 게 뻔한 곳에 같이 죽으러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그냥 개죽음이잖아. 잠깐만 눈 감으면 될 걸. 이대로 도망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텐데. 엔지는 계속 울었다. 나자크가 듣지 않을 게 당연해서, 가지 마, 죽지 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계속 울었다. 가지 마, 나를 혼자 두지 마... 절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울음으로 토해냈다. 나자크는 멈칫했다. 금방이라도 형제들에게로 달려갈 듯 굴던 몸을 움직여 엔지에게로 다가왔다. 피와 땀과 먼지로 더럽고 엉망진창인 손으로 엔지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게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걸 엔지는 겨우 알아차렸다.

"난... 가야 돼. 너도 같이 가자고는 말하지 않을게."
"왜, 왜..."
"여기서 기다리라고도 안 해. 너는 가.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

가서 잘 살아. 내가 아주 예전에 잘 살라고 했는데 왜 그러고 있었어. 나자크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되어 표정을 식별하기 어려웠음에도 나자크가 씩 웃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잘 살아. 이렇게 못 살고 있는 거 또 내 손에 걸리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둔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을 하곤 등을 돌렸다. 나자크가 멀어지는 걸 보며 엔지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의미 없이 느껴졌는데, 어디론가 가긴 가야 할 것 같았다. 잘 살라고. 잘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거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많은 곳을 떠돌았다. 이름을 몇 번을 바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사기치는 건 그만뒀다. 평범하게 일했다. 가끔은 운이 좋아 좋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평범하게 사는 건 지겹고 버거웠다. 그러나 그래도 살다 보니 살 수 있을 것 같아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한국이었다. 어쩌다보니 가족도 생겼다. 이름도 생겼다. 변의주. 남은 생을 그 이름으로 살고자 했다. 그런데 그 앞에 나자크가 나타난 거다. 니콜라스, 라는 처음 듣는 이름으로, 이해하기 힘든 태도로 다가왔다. 의주는 엔지가 되어, 니콜라스에게, 아니 나자크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야.

"대체 왜 나타난 거야.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어디든 가서, 잘 살라고 했잖아. 네가 네 입으로."
"의주, 나는,"
"여기 아는 사람 없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잖아. 너, 혼자 온 게 아니잖아."
"다... 알고 있었구나."

니콜라스가 시선을 푹 떨군다. 의주의 입장을 말하자면 사실은, 니콜라스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한 수준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 치곤 니콜라스는 너무 자주 약속이 있었다. 갈 곳 없는 사람치고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비웠다. 학교에서도 항상 누군가와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니콜라스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고소한 냄새. 그건 니콜라스와, 그리고 의주와 같은 냄새였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동족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아마 니콜라스가 조금 전에 말한 다른 형제들이고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의주는 도저히 니콜라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니콜라스가 어렵게 입을 뗀다. 망설임 가득한 눈빛이었다. 의주, 나는...

"나는... 네가 생각났어."
"...뭐?"
"네가, 자꾸 생각났어. 자꾸 생각나서... 진짜 잘 살고 있는지 봐야 했어."

그게 다야. 니콜라스는 의주와 비슷하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왜 그렇게 신경쓰이는지. 내가 너랑 뭘 하고 싶은 건지. 니콜라스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고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의주에게만 간신히 들릴 지경이었다. 모든 게 이해되지 않는 건 의주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태도로 니콜라스를 대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바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의주를 보며 니콜라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니콜라스가 미안하단 소리를 했다. 의주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괴롭히고 싶은 건 아니었어. 아니, 사실 조금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근데 그냥... 난 네가 보고 싶었나봐."
"...내가 너한테 뭐라고. 경고하는데, 가족이나 동생 같은 소리는 하지 마."
"너무하네. 그렇게 선수를 다 쳐버리면 어떡해."

니콜라스가 하하 웃었다. 그리곤 옆에 놓여있던 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좀 전까지만 해도 쓰다고 인상을 쓰던 애가, 망설임도 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빤히 바라보았다. 니콜라스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의주를 응시했다. 텅 빈 캔을 탁 내려놓고, 명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뭐? 의주가 눈썹을 조금 치켜올렸다. 모르겠다고. 니콜라스가 씩 웃었다.

"넌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해?"
"모르겠는걸 어떡해, 그럼."
"...잘났다, 너."

의주는 제 캔을 들어 남아있던 맥주를 마셨다. 니콜라스와는 달리 그리 많은 양이 남아있진 않았기에, 의주가 맥주를 마신 시간은 니콜라스처럼 길진 않았다. 텅 빈 캔을 니콜라스의 캔 옆에 내려놓고, 의주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기억 속 나자크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얼굴을 뜯어보듯 뚫어지게 응시하자, 니콜라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의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대치 속에, 니콜라스의 얼굴이 먼저 허물어졌다. 프흐흐, 소리를 내며 얼굴이 다 풀어지게 웃었다. 뭐야, 왜 웃어. 아, 진짜- 니콜라스가 말 끝을 늘렸다. 의주, 너 인상 쓰면 되게 귀여워. 뭐?

"귀엽다고. cute. 너 얼굴이 되게 동그래서, 눈에 힘 주면 되게 귀여워."
"넌 진짜... 뭐라는 거야, 갑자기."
"나도 몰라. 근데 귀여운 걸 어떡해. 동그란 애가 눈에 힘 주고 노려보는데 하나도 안 무서워서."

니콜라스는 혼자 웃었다. 그간의 긴장감이 무색하게, 숨이 넘어갈 듯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의주는 황당한 눈으로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진짜 뭐지, 얘는. 니콜라스는 의주가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웃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웃는 걸 멈추었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있는 얼굴로, 의주의 턱을 붙잡고 의주의 얼굴을 살폈다. 막무가내로 구는 것과 별개로 턱을 붙잡은 손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았다.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고 니콜라스의 체온은 따뜻했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얼굴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정말 뭘까... 라며 중얼거렸다.

"가족도 아니고 동생도 아니고. 근데 신경쓰이고. 뭘까, 정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의주, 나 진짜 너를 계속 찾았어. 아주 긴 시간 동안. 왜지? 왜였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아무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계속 신경쓰인 거면... 네가 내 첫사랑이라도 되나? 그런 건가?"
"무슨... 헛소리야!"

소름이 돋아 니콜라스를 뿌리쳤다. 니콜라스의 손엔 애초부터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에 니콜라스는 쉽게 떨어져나갔다. 사랑이라니, 그런 단어가 우리 사이에 말이 될 리가 있나. 농담으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며, 의주는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해. 그러나 니콜라스는 웃고 있지 않았다. 지극히 차분하며 이성적인 얼굴이었다. 의주는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생각이냐고.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거 말곤 없잖아. 동족이라서? 동족은 너 말고도 많았어. 동생이라서? 난 타헬한테는 안 이래."
"장난치고 진짜 재미없으니까, 그만해."
"주주, 나 장난 아닌데."
"그만하라고 했어, 니콜라스."
"난 처음부터 네가 진짜로 미웠던 적은 없어. 네가 엔지였을 때도, 지금도. 그럼 답은 하나잖아."

의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아마 당황스럽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하면서, 겨우겨우 숨을 골랐다. 눈을 떴을 때, 니콜라스의 얼굴은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니콜라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도 그렇잖아. 의주는 순간 혼미해졌다. 그랬나. 모르겠다.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의주를 보던 니콜라스가 픽 웃으며 의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의주, 싫으면 밀어. 피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쌉쌀한 맥주의 맛과 달콤한 젤리의 맛이 같이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 의주는 저도 모르게 같이 눈을 감았다. 숨이 뒤섞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니콜라스는 씩 웃으며 의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안 밀었네. 의주는 혼란스러워서, 니콜라스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뭘 어떡하자는 거야? 그러게. 니콜라스는 대책도 없으면서 대답은 잘 했다. 둘 사이에 얽힌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죄스러운 기억도 부끄러운 기억도 지나치게 많았다. 그러나 제게 닿아있는 니콜라스의 손길은 기꺼웠다. 니콜라스의 손이, 숨결이, 눈길이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주는 입을 열어 간신히 말했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 했어야만 했던 말이었다. 니콜라스, 내가...

"미안해."
"...뭐?"
"사기쳐서 미안하고, 그리고 혼자 도망가서 미안해."
"야, 나는,"
"알아. 너도, 형도 타헬도 이미 용서한 거. 그래도... 사과하고 싶었어. 이제 와서 별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그래."

니콜라스가 의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따뜻한 온도였다. 비슷한 온도로 어깨를, 등을 감싸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누나. 누나가 맞았어. 처음부터 누나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때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까지 오래 헤메지도 않았을 텐데. 의주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리 마음을 먹었다고는 해도, 스스로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내가... 미안해. 니콜라스는 의주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다, 의주의 말이 끝나자 의주를 껴안았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니콜라스가 의주의 등을 토닥거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 니콜라스가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순서가 좀 바뀐 것 같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의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하자."
"뭐?"
"전에 있던 일들은 이제 다 지나간 거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우리."
"...어떻게 그렇게 해."
"왜. 하면 하는 거지. 안녕, 의주. 나는 니콜라스야."

니콜라스가 손을 내밀었고, 의주는 퉁퉁 부은 얼굴로 니콜라스의 손을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야, 이게... 니콜라스는 빨리 손을 잡으라며 의주를 재촉했다. 의주가 마지못해 니콜라스의 손을 맞잡았다. 니콜라스의 손은 컸다. 의주의 손을 다 뒤덮었다. 의주도 빨리 인사. 하... 그래. 나는 의주야,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씩 웃었다. 의주 지금 되게 못생겼다. 야. 못생겨서 귀여워. 눈 엄청 부었어. 물고기같아. 시비 거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 의주한테 반한 것 같아. 나랑 만나볼래?"
"뭐라는 거야, 진짜..."
"아 빨리. 아까 나 안 밀어냈잖아. 나 안 싫잖아, 그치."
"그건, 그렇지만."
"그럼 얼른 받아줘. 빨리."
"그래. 만나보자. 그러자."

대꾸하면서도 대체 이게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니콜라스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고, 니콜라스가 맞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가까이 오게끔 하고, 비어 있던 한쪽 팔로 거세게 끌어안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의주는 못 이기는 척 니콜라스의 품에 안겼고, 니콜라스는 중얼거렸다. 엔지. 아니 의주. 너무 오래 힘들어했다, 너... 그리곤 의주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주주, 우리 지금부터는 그냥 행복해지자. 그래도 돼? 응. 당연하지. 모든게 혼란스러웠지만, 니콜라스의 그 대답만큼은 확신에 차 있었고, 그래서 그냥. 의주는 니콜라스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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